[오마이뉴스 최형국 기자] 지난번 기사에서는 조선시대 '코끼리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주제로 글을 썼습니다. 조선시대에 웬 코끼리, 심지어 그 덩치 큰 녀석과 관련된 연쇄살인사건이라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를 풀어 보았습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조선 임진왜란 때 파병된, 아니 용병으로 조선에 건너와 왜군들과 전투를 벌인 흑인용병의 이야기를 다룰까 합니다. 그 특이한 생김새 때문에 더욱 관심이 증폭됐던 흑인용병의 이야기를 따라 머나먼 역사 속으로 달려가 봅시다.
흑인은 언제 처음으로 조선에 왔을까?
요즘 흑인용병이라고 하면 농구선수들이나 축구선수들이 종종 눈에 띄는 프로 스포츠를 연상할 것입니다. 그 엄청난 근육질에 타고난 도약력을 바탕으로 세계 스포츠에 흑색 열풍을 불게 하는 그들은 과연 언제부터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일까요?
기록을 들춰보면 1394년 태조 3년에 최초로 흑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섬라곡국(暹羅斛國)의 사신으로 조선에 온 장사도(張思道)라는 사람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려 하다가 일본 근해에서 도적을 만나 다시 조선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때 그냥 오기가 민망하여 칼과 갑옷 그리고 구리그릇과 흑인 두 사람을 선물로 바쳤습니다. 아마 그때 당시에도 흑인들은 노예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고통을 당하며 이리저리 팔려나갔나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섬라곡국은 지금의 태국을 말하는데, 이미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때부터 태국과 교류를 하여 많은 정보를 서로 주고받은 상태였습니다. 더욱이 여기에 등장하는 장사도(張思道)는 태국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예빈경(禮賓卿)이라는 조선의 관직을 하사받기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파죽지세로 휩쓸던 왜군들은 점차 '불멸 이순신 장군님'의 도깨비 거북이 작전에 휘말려 바다에서 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루한 전쟁이 몇 년 계속되면서 불멸 장군을 모함하는 세력의 음해로 이순신은 잠시 흰옷을 입고 전투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순신 장군은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조총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여전히 잘 싸우셨습니다. 바로 그때 정유재란이라는 제2차 전쟁을 선포한 왜군의 재출병으로 조선은 또다시 피비린내나는 전쟁터로 변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또다시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1598년 드디어 흑인용병이 조선에 들어오게 됩니다.
선조, 흑인용병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다
당시 명나라에서 조선에 파병된 장수 팽유격(彭遊擊)은 술좌석에서 파랑국(波浪國)에서 온 신병(神兵)을 선조에게 소개했습니다. 여기서 팽유격의 본명은 팽신고(彭信古)로 유격이라는 것은 그의 직위였습니다.
당시 명나라 장수들은 허유격, 팽유격 등의 호칭으로 이름을 대신하곤 하였지요. 요즘의 김병장, 박소위 등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그리고 파랑국은 요즘의 포르투갈을 음차표기로 쓴 것이지요.
팽유격은 선조에게 "제가 데리고 온 병사들 중에 호광(湖廣)의 극남(極南)에 있는 파랑국(波浪國) 사람으로 바다 셋을 건너고 조선과는 15만여 리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온 귀한 전투병입니다"라고 조금은 거들먹거리며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조총과 여러 가지 무예에 출중하여 이번 전투에서 많은 활약을 할 것이라고 의기양양해하였습니다.
이 흑인 병사를 본 선조가 조금은 '오버'하며 말하기를 "조선은 한쪽 구석에 있어서 어디 이런 신병을 볼 수 있겠소이까, 지금 대인의 덕택으로 이를 보니 이 또한 황은(皇恩)이 아닐 수 없소이다, 이제 저 무식한 왜놈들을 섬멸하는 날이 곧 올 수 있겠소이다" 하며 감격의 웃음을 팽유격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술좌석을 떠나며 아마도 '코끼리 연쇄살인사건'의 병조판서 유정현(柳廷顯)처럼 혼잣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에야 인종차별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언급될지 모르나,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과 다른 모습의 사람을 봤다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은 있었겠지요.
"흑인 용병은 바다귀신"
<조선왕조실록>은 흑인용병의 모습을 한 마디로 바다귀신(海鬼)라고 표현했습니다. 간단히 그들의 용모파기를 보자면,
'먼저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은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으며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모두 곱슬머리이며 검은 양털처럼 짧게 꼬부라져 있습니다. 이마는 대머리가 훌러덩 벗겨졌는데, 한 필이나 되는 누런 비단을 머리에 말아 올려 흡사 반도(磻桃)의 형상처럼 머리에 섰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료에서는 그들은 키가 워낙에 커서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전쟁터로 이동하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특기에 대해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賊船)을 공격할 수가 있고 또 수일 동안 물 속에 있으면서 수족(水族)을 잡아먹을 줄 안다"고 적고 있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해군 특수전 여단의 수중폭파 부대인 UDT(Underwater Demolition Team)를 능가하는 엄청난 전투력의 소유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전투에서 실제로 엄청난 성과를 거뒀을까요?
당시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이었으나 전선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조명연합군이 왜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을 상당부분 되찾았다 하더라도 왜군들은 부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왜성을 쌓으면서 끝까지 우리나라를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흑인용병의 가치는 최고였을 것입니다.
흑인들은 왜 전과가 없을까
그러나 당시 이익(李瀷)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흑인용병의 무력함을 가차없이 꼬집었습니다. 당시 직함만 들어도 무지하게 높은 장군이라고 생각되었던 제독한토관병어왜총병관(提督漢土官兵禦倭總兵官) 유정(劉綎)의 휘하부대 병사였던 흑인용병들의 전과가 없다는 것을 속 시원하게 글로 남겼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유정은 경주에서 왜를 공격할 때 단 한 번의 공을 세우지도 못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해귀를 시켜 물속으로 들어가 왜선의 밑을 뚫어 침몰하도록 하지 않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실록에서처럼 흑인용병들이 UDT와 같은 전투력을 보여줬다면 아마도 왜선은 전부 바닷속에 가라앉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우리의 '불멸 이순신 장군님'이 굳이 거북선 돌격과 학익진을 펼치지 않았을 것이고, 더 나아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겠지요. 정말 왜 흑인들의 전과가 없는지 심히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아무튼 조선시대에 흑인용병이 그다지 큰 전과는 올리지 못했지만 흑인용병의 역사가 꽤 긴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농구나 축구경기에서 함께 뛰는 흑인용병들을 볼 때 잠시 역사의 한 부분을 상기시켜 보시길.
이번 기사에서는 조선 임진왜란 때 파병된, 아니 용병으로 조선에 건너와 왜군들과 전투를 벌인 흑인용병의 이야기를 다룰까 합니다. 그 특이한 생김새 때문에 더욱 관심이 증폭됐던 흑인용병의 이야기를 따라 머나먼 역사 속으로 달려가 봅시다.
흑인은 언제 처음으로 조선에 왔을까?
▲ 우리나라 농구 경기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흑인선수들. 그들은 과연 언제부터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일까요? | |
ⓒ2006 박영태 |
기록을 들춰보면 1394년 태조 3년에 최초로 흑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섬라곡국(暹羅斛國)의 사신으로 조선에 온 장사도(張思道)라는 사람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려 하다가 일본 근해에서 도적을 만나 다시 조선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때 그냥 오기가 민망하여 칼과 갑옷 그리고 구리그릇과 흑인 두 사람을 선물로 바쳤습니다. 아마 그때 당시에도 흑인들은 노예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고통을 당하며 이리저리 팔려나갔나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섬라곡국은 지금의 태국을 말하는데, 이미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때부터 태국과 교류를 하여 많은 정보를 서로 주고받은 상태였습니다. 더욱이 여기에 등장하는 장사도(張思道)는 태국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예빈경(禮賓卿)이라는 조선의 관직을 하사받기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파죽지세로 휩쓸던 왜군들은 점차 '불멸 이순신 장군님'의 도깨비 거북이 작전에 휘말려 바다에서 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루한 전쟁이 몇 년 계속되면서 불멸 장군을 모함하는 세력의 음해로 이순신은 잠시 흰옷을 입고 전투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순신 장군은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조총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여전히 잘 싸우셨습니다. 바로 그때 정유재란이라는 제2차 전쟁을 선포한 왜군의 재출병으로 조선은 또다시 피비린내나는 전쟁터로 변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또다시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1598년 드디어 흑인용병이 조선에 들어오게 됩니다.
선조, 흑인용병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다
▲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군이 함경도에 들어왔을 때 의병을 일으켜 대항했던 북평사 정문부의 활약상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때 원군으로 조선에 출병한 명군 중에는 해귀(海鬼)라 불리는 흑인용병이 함께 참전했습니다. |
ⓒ2006 푸른깨비 최형국 |
당시 명나라 장수들은 허유격, 팽유격 등의 호칭으로 이름을 대신하곤 하였지요. 요즘의 김병장, 박소위 등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그리고 파랑국은 요즘의 포르투갈을 음차표기로 쓴 것이지요.
팽유격은 선조에게 "제가 데리고 온 병사들 중에 호광(湖廣)의 극남(極南)에 있는 파랑국(波浪國) 사람으로 바다 셋을 건너고 조선과는 15만여 리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온 귀한 전투병입니다"라고 조금은 거들먹거리며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조총과 여러 가지 무예에 출중하여 이번 전투에서 많은 활약을 할 것이라고 의기양양해하였습니다.
이 흑인 병사를 본 선조가 조금은 '오버'하며 말하기를 "조선은 한쪽 구석에 있어서 어디 이런 신병을 볼 수 있겠소이까, 지금 대인의 덕택으로 이를 보니 이 또한 황은(皇恩)이 아닐 수 없소이다, 이제 저 무식한 왜놈들을 섬멸하는 날이 곧 올 수 있겠소이다" 하며 감격의 웃음을 팽유격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술좌석을 떠나며 아마도 '코끼리 연쇄살인사건'의 병조판서 유정현(柳廷顯)처럼 혼잣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에야 인종차별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언급될지 모르나,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과 다른 모습의 사람을 봤다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은 있었겠지요.
"흑인 용병은 바다귀신"
<조선왕조실록>은 흑인용병의 모습을 한 마디로 바다귀신(海鬼)라고 표현했습니다. 간단히 그들의 용모파기를 보자면,
'먼저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은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으며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모두 곱슬머리이며 검은 양털처럼 짧게 꼬부라져 있습니다. 이마는 대머리가 훌러덩 벗겨졌는데, 한 필이나 되는 누런 비단을 머리에 말아 올려 흡사 반도(磻桃)의 형상처럼 머리에 섰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료에서는 그들은 키가 워낙에 커서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전쟁터로 이동하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 좌수영의 거북선의 모습 -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남해바다를 완전하게 장악한 것은 돌격용 철갑전선인 거북선의 힘이 컸을 것입니다. |
ⓒ2006 푸른깨비 최형국 |
당시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이었으나 전선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조명연합군이 왜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을 상당부분 되찾았다 하더라도 왜군들은 부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왜성을 쌓으면서 끝까지 우리나라를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흑인용병의 가치는 최고였을 것입니다.
흑인들은 왜 전과가 없을까
그러나 당시 이익(李瀷)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흑인용병의 무력함을 가차없이 꼬집었습니다. 당시 직함만 들어도 무지하게 높은 장군이라고 생각되었던 제독한토관병어왜총병관(提督漢土官兵禦倭總兵官) 유정(劉綎)의 휘하부대 병사였던 흑인용병들의 전과가 없다는 것을 속 시원하게 글로 남겼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유정은 경주에서 왜를 공격할 때 단 한 번의 공을 세우지도 못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해귀를 시켜 물속으로 들어가 왜선의 밑을 뚫어 침몰하도록 하지 않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실록에서처럼 흑인용병들이 UDT와 같은 전투력을 보여줬다면 아마도 왜선은 전부 바닷속에 가라앉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우리의 '불멸 이순신 장군님'이 굳이 거북선 돌격과 학익진을 펼치지 않았을 것이고, 더 나아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겠지요. 정말 왜 흑인들의 전과가 없는지 심히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아무튼 조선시대에 흑인용병이 그다지 큰 전과는 올리지 못했지만 흑인용병의 역사가 꽤 긴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농구나 축구경기에서 함께 뛰는 흑인용병들을 볼 때 잠시 역사의 한 부분을 상기시켜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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