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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화가가 그린 1898년의 한양 - 휴버트 보스(Hubert Vos, 1855-1935)



 

 

미국인 화가가 그린 1898년의 한양

 

» 휴버트 보스 유채 31 x 69cm 189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내가, 사라진 모습이나 풍경을 보며 옛 흔적을 느끼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과거가 갖고 있던 한가로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너무 정신없으니까, 아니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너무나 빨리 변하니까, 삶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여유를 갖고 싶다는,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의 발로일 수도 있다.


지금은 번잡하기 이를 데 없는 신문로와 태평로 부근의 모습이 한가롭기만 하다. 네덜란드 태생의 미국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 1855-1935)가 1898년 서울에 와서 그렸으니 백 년도 더 지난 작품이다. 미국에서 통용되는 이 작품의 제목은 <미국공관에서 바라본 서울풍경>이다. 당시 미국공관은 정동,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지금의 덕수궁 뒷길에서 덕수 초등학교 가는 길 언덕에 있었다. 그 언덕에서 그렸기 때문에, 그림 속의 풍경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듯 보이는 것이다.

나는 도록을 통해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서울이 그렇게 변했는데도 백여 년 전의 그림 속에 아직도 알아볼 수 있는 흔적들이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신문로 부근에는 70년대에도 골목골목에 수십 년 된 기와집이 많았고, 나 역시 그곳에 있는 조그만 한옥에서 살았다. 미로 같은 골목이 많아, 방과 후면 친구들과 술래잡기 놀이를 많이 했는데, 숨을 곳이 너무 많아 저녁 어스름이 질 때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 수 있는 그런 동네였다.

물론 지금은 재개발로 그 많던 기와집들이 거의 사라졌지만.

이 그림의 가운데에 보이는 3채의 건물은 맨 앞이 광화문이고, 그 뒤가 근정전 그리고 맨 뒤가 경회루이다. 그런데 지금의 광화문은 그림에서 보이는 광화문이 아니기에, 잃어버렸던 조상의 숨결을 다시 만난 듯한 감회도 몰려왔다.


그림에서 보이는 광화문은 지금의 광화문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구 중앙청 건물을 지으면서 자리를 옮겼고, 한국전쟁 때 많이 파손되어 허물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광화문은 1968년에 다시 지은 건물인데, 문화재관리국 자료에 의하면 원래의 자리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옮겨졌으며 중심축도 틀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광화문을 원래의 자리로 되옮기는 복원공사를 하고 있고, 2010년 복원공사가 끝나면 이 그림에서 보이는 위치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경복궁은 당시 한양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광화문을 출입문으로 하는 경복궁은 이렇게 예나 지금이나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적 건물이고 장소였다. 그러나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경복궁은 비어 있었다. 일본의 위협을 느끼고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관에 1년 동안 피신해 있던 고종이 1897년 2월 환궁할 때,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갔기 때문이다. 경운궁 주변에는 외국공관들이 모여 있어, 일본이 함부로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구한말 대한제국의 현실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울 풍경>에서 경복궁과 함께 눈에 띄는 부분은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다. 만약 보스가 웅장한 경복궁의 모습만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다면, 이 작품은 평범한 풍경화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흰색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행인을 몇 그려 넣어, 그림에 생동감이 흐르게 했다. 흰옷 입은 사람 몇이 이렇게 그림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으니,이런 화폭 구성 감각이 화가의 능력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스는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다니던 모습에 대해, “...그곳(조선)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중의 하나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항시 “유령처럼” 흰옷을 입고 마치 꿈속에서처럼 아무 말 없이 걸어 다녔다...” 라고 회상했다.

이 내용은 보스가 지인에게 1911년에 쓴 ‘자전적 편지’ (1911년)에 있다. 이 편지는 미국의 언론인이자 사진작가가인 크리스틴 팜이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영문잡지 <코리아 쿼터리> 1979년 겨울호에 발표한 ‘휴버트 보스는 누구인가...1898년 서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라는 글에서 소개했다.

크리스틴 팜은 1979년 미국의 코네티컷 주에 있는 스탬포드 박물관에서 열린 보스의 ‘유작전’을 취재해서, 이 편지와 보스가 남긴 한국 소재 작품들의 존재를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알린 것이다. 팜의 글이 발표되자 미술사학계는 깜짝 놀랐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보스의 한국 소재 작품 전시회를 추진해서 1982년에 성사되었다.

» 휴버트 보스 <민상호 초상> 캔버스에 유채 1898 - 1899년 사이 (필자 추정). 개인소장

보스는 '자전적 편지'에서, 고종이 자신이 그린 민상호의 초상화를 본 후에 고종의 어진과 당시 황세자이던 순종의 예진을 그리라는 '황명'을 내렸다고 밝혔다. 민상호는 명성황후의 후원으로 미국에 유학한 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공관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다 귀국해서, 당시 외부 협찬(외무부 차관)이었다. 이란 직책 때문에 그는 미국공관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고, 미국공관 사택에서 보스 부부와 함께 지내던 샌즈 서기관이 두 사람을 소개해줬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조선인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우리나라에 온 보스로서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인물이 매우 훤칠했던 민상호의 초상화를 먼저 그린 후, 황제의 초상화를 그려서 박람회에 출품하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했던 것 같다. 당시 우리나라가 외세 때문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외국의 화가가 대한제국(1897년10월 12일 선포)의 황제와 황세자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당위성과 화가의 실력을 증명하는 절차가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민상호 초상>을 보면, 보스의 초상화 실력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는 느낌이 든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표정이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시 권세가로 갖고 있던 위엄이 잘 나타났다. 머리에 쓴 정자관과 은은한 색의 한복 그리고 가슴에 두른 띠 등 화가가 어느 한 부분 소홀하지 않고 정성을 담아 그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민상호에게서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엄격함이 그리고 정성을 다한 화가의 붓질에서는 치열한 작가정신이 느껴진다.

이 초상화에는 한글로 두 사람이 쓰여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한글에 대해 어느 미술사가는 우리나라 사람이 써줬을 것으로 추정했다. 외국 화가니까 한글을 못 썼을 것이라는 짐작에 근거한 추정이다. 그러나 보스는 1905년에 그린 <서태후 초상>에 있는 한문을 누가 썼느냐고 묻는 <뉴욕타임스>기자 질문에, 자신이 연습해서 직접 썼다고 밝혔다. 이런 사실을 통해, 보스는 어려운 한문도 스스로 연습을 한 후에 쓸 정도로 자신의 화폭에 다른 사람이 손대는 것을 원하지 않는 화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섬세하고 꼼꼼하게 붓질을 하는 초상화가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민상호 초상>의 한글 역시 그가 직접 썼을 것으로 추정해도 크게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된다.

보스는 훗날 중국의 서태후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동서양의 많은 상류사회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가 초상화에 대해 탁월한 기량을 인정받으며 활동했다는 사실은, 영국 왕립 초상화가 협회(The Royal Society of Portrait Painters 1891년 창립)의 창립회원이자 정회원으로(당시 영국 평론가 Walter Sickert의 책 'The Complelete Writing on Art 옥스퍼드 대학 출판사 발행' 9쪽) 활약하고 있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명성은 그가 주로 활동한 영국뿐 아니라 미국에까지 잘 알려졌었다.

» 1895년 10월 1일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보스 관련 기사 부분

위에 소개한 <뉴욕타임스> 기사의 전체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시카고 만국박람회 네덜란드관의 왕실 커미셔너이자 화가인 휴버트 보스씨가 어제 유럽에서 증기선을 타고 도착했는데, 영부인 클리블랜드 여사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계약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영부인이 자신이 그린 법무부 장관의 초상화를 보고 경의를 표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서너 명의 미국 부인들 초상화를 그리기로 계약했기 때문에, 8개월 동안은 다른 초상화를 그릴 시간이 없고, 그 작업이 끝나면 다시 여행을 떠날 계획이라고 밝혔다."라는 내용이다.

기사에서 그로버 클리블랜드 부인이라고 표기된 영부인은 당시 31세의 프랜시스 폴섬 클리블랜드 여사로, 그녀는 클리블랜드 대통령 친구의 딸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27년이었고, 클리블랜드가 처음 미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해인 1886년에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나이가 22살이라 미 역사상 최연소 영부인이었는데.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클리블랜드는 188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1892년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어, 이 기사 실렸을 때는 폴섬 여사 역시 2번째로 백악관에서 생활할 때다.

민상호는 이렇게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보스가 자신의 초상화를 완성하자, 고종을 알현하여 보스라는 미국 화가가 황제의 어진을 그려서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하고 싶어한다는 의사를 전달했을 가능성이 크고, 고종은 민상호가 갖고 온 초상화를 본 후 보스의 실력을 인정하고 '황명'을 내린 것이다.

» 휴버트 보스 <고종 황제 전신상> 유채 198.9 x 91.8cm 1899년 국립현대미술관 대여소장

고종 황제 48세 때의 전신 초상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황제나 왕의 초상화는 의자에 앉은 모습을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초상화는 서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 특이하다. 그리고 고종의 다른 어진이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일월오악도> (해와 달 그리고 산과 폭포가 그려진 그림)도 보이지 않고, 옆과 뒷부분을 여백에 가깝게 처리했다.

보스가 이렇게 배경처리를 허술하게 한 이유는, 그가 초상화를 그릴 때, 회화적 성취보다 인류학적 관점에 맞게 표현한다는 신념에 충실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종이 갖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의 인류학적 특성을 극대화하려고 배경과 좌우 장식을 모두 생략했을 가능성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술사가나 평론가들의 연구를 기대해 본다.

<고종황제 초상화>의 상반신 부분에는 보스의 탁월한 기량이 잘 나타나 있다. 보스는 ‘자전적 편지’에서 “황제와 그 백성들의 미래에 대해 슬픈 예감을 갖고 떠났다.”라고 했다. 미국공관에 머물면서 당시 우리나라의 정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고종의 표정을 우울하게 그렸다고 할 수 있다.

보스는 고종이 입고 있는 황룡포와 대한제국을 의미하는 태극무늬와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 있는 가슴 부분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황룡포를 아무리 잘 그려도, 표정때문에 황제의 권위는 보이지 않는다. 표정 속에 보이는 감정이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리라! 그래서 <고종황제 초상화>는 그가 추구하던 인류학적 관점에서의 초상화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황제의 권위가 나타나야하는 ‘황제의 초상화’로서는 실패한 작품일 수도 있다.

보스의 ‘자전적 편지’의 기록에 의하면, 고종은 이 초상화에 만족했고, 보스는 “황제로부터의 선물”을 받고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미술사가 이구열 선생은 이 선물이 만 원이었다는 당시의 기록을 찾아내, 198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구한말 미국인 화가 보스가 그린 고종황제 초상화 특별전’ 카탈로그에 실었다.

이구열 선생이 찾은 기록은 “몇 달 전에 미국 화사 보스씨가 미국 공사관에 왔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보스는 동양 여행을 하면서 여러가지 풍속을 그려 내년 파리 박람회에 출품할 계획이라더니, 다시 들리는 바로는 그가 (고종의)어진과 (순종의) 예진을 그려 바치고 그 보상으로 1만원을 받고 일전에 떠나갔다더라.” 라는 1899년 7월 12일 ‘황성신문’ 기사와, 황현의 ‘매천야록’,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 속편’, 프랑스인 마르텔의 <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사>등에 있는 보스 관련 부분을 모두 찾아냈다. 참으로 대단한 노력의 성과다.

당시 만원은 기와집 몇 채 값이었는데, 고종은 그림 값 인심이 후했는지, 1912년에 고종의 어진과 순종의 예진을 그린 이당 김은호에게도 한 점당 4천 원씩 모두 8천원의 하사금을 내렸다.

이당이 어진과 예진을 그리는데 소요되었던 시간이 각 4개월씩 모두 8개월이라고 했으니, 한 달에 천원으로 계산했는지도 모르지만, 액수로는 보스에게 준 사례비와 비슷하다.

물론 12년 후의 돈이라 가치가 떨어지겠지만, 김은호는 자서전 <서화백년>에서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이 4원이었고, 서울에 있는 8칸짜리 초가집이 250원 정도, 유명인의 초상화를 그렸을 때의 후한 사례비가 4 - 50원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렇다면, 보스라는 화가는 왜 미국에서 배를 타고 머나먼 조선에 왔고, 고종 황제와 당시 왕세자이던 순종을 그린 것일까?

» 보스의 결혼식을 소개한 1897년 11월 17일 자 <뉴욕타임즈>

위의 기사를 요약하면 ‘초상화가 보스가, 하와이 왕조의 마지막 왕이자 (유일한 여왕)이었던 릴리오우칼라니가 뉴욕을 방문할 때 수행원으로 따라왔던 하와이 왕조의 ‘마지막 공주’를 보고 반해서 3일 만에 청혼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지난 금요일 결혼식을 올렸다. 보스는 부인과 함께 하와이로 갔다가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한 후,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엑스포)에 참석한다는 계획을 밝혔다.’라는 내용이다.

보스는 기사에서 언급한 대로 1898년 하와이에서 출발해 아시아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위에서 언급했던 ‘자전적 편지’에서,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그림 중 세계 여러 민족을 볼 수 있는 초상화가 너무 없음을 느끼고, 자신이 그 작업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이유로 그는 그동안 세계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생각으로, 결혼 다음 해인 1898년 부인과 함께 하와이를 떠나 우리나라에 들른 것이다. 그가 2년 동안 방문한 나라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중국, 티벳, 자바(인도네시아), 인도 등이다.

» 휴버트 보스 <자화상> 유채 1901년

그렇다면 그는 그 머나먼 뱃길을 부인과 함께 왔던 것일까? 그렇다. 1898년에 서울주재 미국공사관의 1등 서기관으로 부임한 W. F. 샌즈가 훗날 저술한 <조선비망록> (신복룡 번역, 집문당) 115쪽에 “우리 집에서 나와 함께 머물고 있는 네덜란드 예술가와 그의 아내”라는 부분이 실려 있고, 그 네덜란드 화가가 휴버트 보스라고 134쪽에서 밝히고 있다.

보스가 백여 년 전에 증기선을 타고 우리나라에 와서 그린 그림들의 가치는 회화적, 사료적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서울 풍경>을 소장하고 있던 손자를 설득해 결국 소장품 목록에 오르게 한 국립현대미술관과, <민상호 초상>과 <고종황제 초상화>를 구입해 국내로 들여 온 소장가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보스의 작품과 관련된 옥에 티라면, 현재의 국립현대미술관 도록에는 <서울풍경>의 제작 연도를 화가의 연대표시인 1898년을 부정하고, 일부 미술사가들의 추정 연대인 1899년이라고 표기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보스는 1898년에 하와이를 떠나 동남아 여행길에 올랐고, <서울 풍경>의 아래부분에 1898년에 그렸다고 연도를 밝혔다. 그럼에도 고종의 초상화를 1899년에 그렸으니, <서울풍경>도 1899년작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미술사학적으로 옳지 않다. 더욱이 그가 동남아 나라에서 그린 작품들의 연대 표기를 보면, 대부분 나라를 두 번 방문했기 때문이다.

화가의 표기 연대는 틀렸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발견되기 전에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림과 화가를 사랑하는 애호가로서의 생각이다. <서울풍경>이 하루빨리 화가가 남긴 연대 표기를 되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http://cafe212.daum.net/_c21_/bbs_list?grpid=11qTR&mgrpid=&fldid=7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