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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기울여...

"나는 나의 이야기에 만족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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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나의 이야기에 만족하는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신은 예술가이며, 삶은 당신의 작품이기 때문에 당신이 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신의 이야기이다. 당신의 희극이고, 당신의 비극이다. 만약 그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든 바뀔 수 있다면, 깨달음을 통해 그 변화를 주도하고 싶지 않은가? 이제 깨달음을 얻은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당신의 예술이 마음에 드는지 생각해볼 수 있고, 더 나아지도록 노력해볼 수도 있다.


연습은 달인을 만들지만 그러나 진정한 변화를 만드는 것은 실천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난 뒤 내가 취한 행동은 내 자신의 작품에 책임감을 갖고 프로그램을 정화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나는 모든 작용과 반작용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탐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본성이다.


무엇을 탐험할까? 바로 삶이다. 그 외 우리가 탐험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삶의 이야기를 바꾸는 것을 톨텍에서는 "변화에 통달했다"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당신 자신과 이야기꾼, 그리고 꿈꾸는 자를 변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삶은 너무 빨리 변하고 있고, 자신도 항상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 변화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을 때 당신은 변화에 통달한 것이다. 변화에 통달하면 그 변화를 이용하고 즐길 수 있게 된다. 변화에 통달한다는 것은 항상 현재에 사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영원한 현재이다. 생명의 힘은 모든 것을 '지금 이 순간' 창조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지금 이 순간'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삶에서 당신이 결정한 모든 일에 책임감을 가질 것을 권한다. 어떠한 결정도 옳거나 혹은 그르지 않다. 오직 중요한 것은 선택에 따른 행동이다. 삶의 모든 것은 하나의 선택이며, 당신은 선택을 통해 꿈을 통제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선택에는 결과가 있다. 통달한 자들은 그 결과를 알고 있다.


인생은 너무나 아름답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를 사랑한다면, 그리고 늘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은 머지않아 하나의 습관이 될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어린아이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나의 행복을 위해 준비된 선물이 된다. ◇

[돈 미겔 루이스 / The Voice of 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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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만나 본 사람들마다

그들의 재질과 아름다움을 표출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실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랑과 관심을 표명하고 이것을

아무 거리낌없이 공공연히 드러내 보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에게

충고를 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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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밤의 논제를 "자신을 망치는 반(反)자아 장치"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테지만, 여러분이 자신이 되지 못하고 있는 주된 이유는 여러분 자신의 사고방식이 여러분의 성장에 방해가 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 그릇된 방식의 껍질에서 탈피할 것을 간청합니다. 그 껍질을 탈피하여 창공을 나십시오. 그러면 충만한 인생과 사랑을 만끽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를 의무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증오하기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패배적 사고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라고 말하는 자신의 소리를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진정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항상 집에서 "못 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가서 해봐?" 라는 핀잔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든 그 일을 해내고야 말았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일정표를 보여주면, 해낼 수 없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할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지 않겠다." 라고 말하는 것은 막다른 골목과도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한테 얻어맞고 싶으면 "안 하겠어요." 라고 말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뭐라고? 안하겠다고? 이놈의 자식이"  면서 손등을 때리곤 하셨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는 "예(YES)" 입니다. 여러분은 이 단어가 얼마나 아름다운 낱말인지를 생각해 본 일이 있으십니까? 나는 이따금 사람들에게 "영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무엇이겠습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예스인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길게 늘어뜨려 발음하는 예스인 것입니다. 그 단어는 예------스 하고 한도 끝도없이 계속되는 아름다운 단어인 것입니다.


"아니오(NO)"라는 말은 막다른 길입니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창문과 문들이 닫혀지고, 여러분은 코코넛 속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예스라고 말하기가 망설여지고 겁이 난다면, 가능성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나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이런 말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꼭 한 가지 방법밖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그 방법을 찾아 시도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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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

"그런 일을 하기에는 나는 너무 늙었어."

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여러분은

"나는 너무 늙어서 공원에도 갈 수 없고,

숲속에서 춤출 수도 없다." 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들어 왔습니까?

시험삼아 한 번 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얼마나 젊었는지 알아보십시오.

우리는 나이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내 나이를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골치 아프고 기분 나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이를 결부시키는 순간부터,

나이에 걸맞는 행동을 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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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나는 전에 상처를 입은 일이 있기 때문에, 앞으론 절대 두 번 다시 남을 믿지 않을 거야." 라고. 그 상처가 그렇게도 대단하다는 말입니까? 고통 속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어리석은 세상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언제나 최고로 즐겁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죽음이 우리들에게 인생에 대한 교훈을 주듯이, 불행은 우리들에게 즐거움에 대한 교훈을 남겨주는 것입니다. 불행이 다가올 때에는 그 불행을 끌어안고 "이것 또한 내 인생의 일부이다." 라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그 불행을 경험하십시오. 그리고 그 불행을 다시 한번 느끼는 법을 배우십시오. 불행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이로 인해 상처를 받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하시오. 슬픔에 못 이길 때는 소리도 지르고 울부짖기도 하며 벽이라도 물어뜯으십시오. 고통을 경험하십시오. 우십시오. 식탁을 힘껏 내리치십시오. 화를 내십시오. 그리고는 슬픔을 마음 밖으로 몰아내십시오. 그렇게 한 후에 깨끗이 잊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슬픔은 가슴속에 영원히 쌓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위궤양이나 편두통에 걸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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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를 제한시키고,

우리를 고독하게 만드는

이 같은 자기 패배적 사고 방식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우리를 따분하게 만들고

자발성과 경이로움을 말살시키는 반자아적 사고 방식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이러한

사고 방식으로 인해

삶을 거부하고, 성장을 거부하고,

변화를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타도합시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디서 이러한 사고 방식들을 배우는 것일까요?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으로부터 이를 배우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성장과 인간의 존엄성을 배우는 데에는 가정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적은 사랑을 나타내는 경우가 때때로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무엇보다 좋은 점을 발견하지 못한 채 하루를 보내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좋은 점을 발견하게 되면 본인에게 말해주십시오. 오늘 당장에 찾아내기는 어려울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찾아내야 합니다. 좋은 점을 발견했을 경우에는 "그것 참 훌륭한데." "참 잘했어."라고 칭찬해 주십시오.



우리는 일상 생활을 통해 서로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들이 "사랑이 너무 어려워요." 라고 말하면, 나는 "사랑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복잡한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사랑은 시달림에 지친 웨이트레스에게 '고마워요. 참 훌륭한 음식이군요.' 라고 말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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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을 때는

그에게 다가가서 "당신은 아름답다." 라고

말해 주는 걸 의미합니다.

그런 말을 한 다음에는 얼른 돌아서십시오!

왜냐하면 이 말을 듣고 상대방이 깜짝 놀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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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가정에서 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자기 패배적 사고 방식을 배웁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 문화는 줄곧 우리들에게 의심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뢰하지 말라, 믿지 말라, 모든 것을 두려워해라." 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짓은 고작 남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더욱 더 높은 벽들을 쌓아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여러분과 나 사이에 벽을 쌓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들 한 가운데로 뛰어들고 싶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겪어보고 싶습니다. 나는 여러분들로부터 보호받고 싶지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믿겠습니다. 여러분을 믿다가 발등을 찍혀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여러분을 놓치고 싶지가 않습니다.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우리 문화는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야." 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 사람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이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녀에게조차 남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조그마한 다리들을 놓기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이웃을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 년 동안을 한 곳에서 살아도 말입니다. 누군가가 찾아오면 문열어 주기를 두려워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극히 유감스러운 일은 한 번 이러한 불신감과 의구심에 빠지게  되면, 새로 배우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이 불신이 여과기를 통해 걸러내기 때문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발전을 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불신감과 의구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세계는 지극히 작은 범위 내로 축소되어 버리고 의심과 추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추함을 통해 여과된 것만을 봅니다.

우리는 우리가 거기에 투영시킨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는 것마다 의심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무서워하고 늘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아름다움과 인생으로부터 단절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 해로운 짓은 하지 맙시다. 이 얼어붙은 자아에서 탈피합시다. 여러분 모두가 성스러운 존재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신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탄생시키십시오. 자기 자신을 밖으로 끄집어내십시오. 여러분과 나 사이를 틈나게 하는 모든 자기 패배적인 사고 방식이나 기타의 타성을 떨쳐버리십시오. 다시 남을 신뢰하고 용서해 주는 법을 배우십시오. 남도 나와 다르기보다는 유사한 점이 더 많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는지는 잘 모르지만,

나를 믿으십시오.

나 역시 여러분과 같은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나 역시 여러분 못지 않게 당황을 하고

여러분 못지 않게 외로우며,

절망하기도 하고 자주 울기도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보다

인생에 대한 해답을 더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도 여러분처럼 인생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때가 많습니다.

또한 나는 여러분들보다 더 많은 해답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을 신비로운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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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에게 "죽음은 왜 있는 것일까? 고통은 왜 있는 것일까? 어린아이들이 왜 죽어야 한단 말인가?" 하는 내용의 편지를 합니다. 이러한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나는 "나라고 해서 어찌 할 수가 있습니까?"하고 오히려 반문을 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위대한 사람들이 수세기를 두고 이러한 문제들을 탐구해 오고 있습니다. 나도 어째서인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누군가가 "그러한 문제들에 너무 몰두하기 때문에 오히려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라고 한 말이 기억납니다. 나는 매우 능동적으로 삶에 임하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경험하고, 모든 것을 알고 싶습니다. 인생을 낱낱이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만들어낸 베니어 합판(이는 자기 패배적인 합판인데) 밑에는 나처럼 의구심에 차 있고, 두려워하고, 고독하고,  즐겁게 살고 싶어하고, 죽기 전에 자기 자신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으며, 매우 안정되어 있는 척하며 행동하기 때문에 "나는 약점이 많고 실수를 하며, 불완전하며, 소중한 재산이다. 내가 오직 바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되는 데 있다." 라고 말하면 차라리 홀가분한 것을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점보다 닮은 점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으므로 당신과 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를 놓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참된 자아는 나 자신과 그리고 여러분들 주위에 있는 그 어떤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이 다리들을 통해서만이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를 불신하는 폐습은 버립시다. 남을 믿는다는 것은 도박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만사 모든 것이 도박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최선인 것이 무엇인지 알만큼 충분히 현명치 못하다는

자기 패배적 사고 방식을 떨쳐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내부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여러분 자신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여러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여러분 자신만큼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스스로 완전한 자아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계속 부인한다면, 다른 이가 이를 떠맡게 되어 여러분은 정말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스승을 따르라." 는 허튼 짓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은 "내가 이 사람이 시키는 대로 따르면, 나를 잘 되게 만들어 주겠지." 하는 생각에 젖어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 사람의 말을 따른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또 하나의 그 사람과 같은 인간이 될 뿐, 여러분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교사란 안내자에 지나지 않을 뿐, 정작 여행을 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밖에는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길은

나의 길 못지 않게 유용한 것입니다.

다만 그 길이 파탄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

선과 부드러움, 아름다움과 즐거움과 성장으로

이끄는 길이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여러분 자신을 신뢰하십시오.



이러저러한 일들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컬럼들은 많이 있지만, 이 컬럼을 쓰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해줘야 할 말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읽기에는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 충고대로 해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어떡하면 됩니까?"라고 물을 때마다, 나는 "당신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은 당신의 내부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완전한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직접 그것을 접해 본다면,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답장을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 그것이 무엇인지를

여러분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에 경청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여러분 자신이 말해 주는 조언에 따라서 행동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법을 배우십시오.

다시 한 번 듣고, 믿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시험삼아 한 번 해보십시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조화롭게 되며

또 여러분이 행하고 있는게 여러분에게

유익한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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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의심하십시오.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나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할 때는 기꺼이 들어주기는 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인생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는 여러분이 직접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여러분은 자아를 해방시켜 스스로 자유롭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자유롭도록 허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여러분 자신이 책임을 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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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완벽주의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완벽주의 따위는 잊어버리십시오!

인생이란 소풍처럼 즐거운 것입니다.

실수 좀 해도 괜찮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실수를 함으로써 인생이 더욱 즐거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녁밥을 태웠다면 외식을 하면 될 게 아닙니까?


여러분은 오늘밤에 자기 패배적 사고 방식을 떨쳐버리고 신이 뜻하는 대로 되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신의 은총에 다소라도 보답할 수 있는 길입니다. 자기 자신이 되지 않은 채 어떻게 감히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겠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간단한 일입니다. 그것이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변화는 언제나 가능합니다. "늙은 개에게는 새 재주를 가르칠 수 없다."는 자기 패배적인 격언을 듣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괴로운 일입니다. 나는 늙은 개에게 여러 가지의 재주를 가르쳐준 경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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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선택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은 하나의 선택인 것이며,

선택을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도 있고,

또 슬프게도 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경솔할 수도 있고 진지 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