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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전 독도 수비대원의 일기&"울릉도와 독도는 가시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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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대원의_일기.JPG


 

 조국의 최동단 동해의 요쇄, 독도에서 을미년 첫해는 떠올랐다. 해발 1백20미터,
총면적 14평방킬로미터,의 이 고도에는 이날도 영해를 지키는 우리 해안경비대원들이
임무를 완수하고 있다.

[울고 왔다 울고가는 섬] 갈매기 슬피 울면 우리의 다사다난했던 1개월간의 근무일지에도
종지부가 찍히고.... 나와 대원들도 부모처자를 다시만나 독도의 지난날을 이야기 하겠지.

물개 가족들의 다정한 모습이며 식수가 없어 곤란했던 일.
의료시설이 없어 맹장이 걸리면 영락없이 삶을 포기해야 된다는 등.
독도는 이같은 여건으로 배를 타고 올때 울지만 막상 떠날때면 추억어린
돌벽을 붙들고 울어야 하는 섬이다.

약간의 풍랑에도 암석의 경사 때문에 교대병력조차 상륙할 수 없어 3개월간
근무해야 되고, 바람이 심하면 망을 보는 도정에는 경비원들이 걸어다닐 수 없어
꼼짝 못하는 곳이다.

이 도정에서 우리 경비원들은 간혹 국적물명의 선박이 섬앞 20마일 해상까지
출몰하는 것과 고기떼를 따라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어선단을 발견하나
요즘은 통 그런 선박이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한달전, 빗물을 받아 받을 짓고있다. 식수로는 세수를 단념.
한 [컵]의 양치물도 여러 사람이 순번으로 나누어 써야 한다.
최근 2톤가량의 천수를 저장하는 [콘크리트 탱크]를 설치했으나 빗물은 2,3일만
지나면 자연부패하기 때문에 그것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물.. 의료시설 모두우리가 갈망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희구하는 것이 있다.
따뜻한 손길. 동쪽 수평선에 떠올랐던 해가 서쪽 수평선에 지는 나날을 지켜
보느라면 사람이 그립고 육지소식이 그리워 진다. 한통의 위문편지라도 우리
외로운 독도에 있는 경비원들에겐 국토방위의 커다란 에너지가 된다.

<독도 경비 순경> 고병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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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킨 우리의 독도입니다.
(저의 아버님이 그 일원중의 한분이셨다는 것에 다시금 자랑스럽습니다)


 1. 울릉도와 견적필살 그리고 독도

 구글의 울릉도 위성사진 모습입니다.  5각형의 섬모양입니다. 저에게 울릉도는  일반인들과는 달리 매우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울릉도는 저의 외가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민학교때까지 여름방학때 놀러가서 놀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의 아버님이  독도 수비대 출신입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예전에 올린 바 있는데 기억들 하실런지요?

구글_울릉도.jpg

 위의 위성사진과   아래 울릉도 요약도를 비교하면서 보시기 바랍니다.  가운데 움푹한 곳이 나리분지 입니다. 혹자는 저곳에 비행장 건설을 말씀하시는데  울릉도를 아는 사람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압니다.  보기보다 매우 좁은 곳입니다. 울릉도는 제주도와 같은 화산섬으로서  나리분지 자체가 바로 분화구 입니다.  백록담에 비행장 건설하자는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또 밑에 요약도 보시면 죽도(竹島:일본말로는 다케시마)가 보이죠?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저곳에서 생산되는 수박맛은 끝내줍니다.  독도를 죽도라고 부르는 일본넘들 아무래도 대나무 회초리 맛을 봐야 할듯.


울릉도_요약도.jpg


2.울릉도 관문 도동과   포항 울릉간 여객선의 변천사


 다음의 사진은 매우 귀한 사진들입니다. 1920년대  울릉도 도동의 모습입니다.  당시 울릉도는 일본에서 함경도 흥남이나 청진등으로 갈때 중간기착지 역할도 하였다고 합니다.  도동 앞바다에 정박한 선박 보이시죠? 저 배가 당시 연락선입니다.  당시 연락선은 석탄과 보일러를 이용한 선박이었답니다.  그 당시 벌써 3,000톤짜리 연락선이 운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깐 이야기 하자면 조선후기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극에 달할 무렵 조선조정은  울릉도에 대한 소개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조선조정의 가렴주구식 세금수탈을 피해서  당시 백성들이 중앙조정의  간섭을 피할 수 있는 섬으로 많이 도망갔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조세회피성 이주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조선조정은  세금문제로 도서지방 소개령을 내렸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울릉도에 인구가 유입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제일 인구가 많았을 때는  일제시대로 약 4만이 넘는 인구가 살았었다고 합니다. 

▼ 1920년대 도동항의 모습과  당시 연락선 (저 연락선은 일본과도 연결되는 연락선임)

DSC00745.jpg


60년대 도동항의 모습입니다.  저 어선들 대부분이 오징어 잡았던 배들이죠.  그런데 보시면 알겠지만 어선의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디자인 자체가 바로 일본어선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어선의 디자인을 보다  현대적으로 바꾸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 어선과 일본어선의 모습 사실상 구분 불가능입니다.  뜻있는 디자이너가 있다면  소형어선에 대한 디자인 개선책을 하나정도 발표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어선은 어로작업에 불편한 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 1960년대 도동항의 모습과  어선들.

도동항사진.jpg


이사진은 70년대 초반 도동항의 모습입니다.  청룡호도 보이는 군요.  접안시설 자체가 없을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빨간색 부분은 현재 접안시설로 된 부분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 1970년대 초반의 도동항의 모습 (당시 포항 울릉간 연락선인 청룡호의 모습입니다)

70년대_초반_도동항.jpg



다음의 사진은  70년대 도동항에 정박한  포항 울릉간 연락선인 "청룡호"의 사진입니다.  울릉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청룡호를 몰라서는 곤란할 정도로 유명한 배입니다.  울릉도민과 생사고락과 희노애락을 같이한  울릉도의 분신같은 연락선입니다.   저도 국민학교 3학년때까지 울릉도 갈땐 저 배를 타고 갔습니다.   재원으로는  만재 350톤으로 속도는 10노트입니다.  포항 울릉간을 무려 10시간에 걸쳐서 운항하였습니다. 지금의 쾌속선은  3시간에 주파합니다.   저 청룡호가 다니기 전에는 아리랑호라는 목선이 다녔었다고 합니다.  외할머님 말씀에 따르면 해방직후  일본이  배라는 배는 모조리 가지고 갔기 때문에 한동안  울릉도와 육지간의 연락이 끊긴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땐 저 청룡호가 큰 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보면 너무도 작은 배입니다. 주변의 어선과 비교해 보시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울릉도 도동항엔 부두가 건설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이  일종의 바지선에 내려서 다시 뭍에 올라 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하시게'라고 합니다.  일본말일듯 합니다.


▼ 6~70년대 포항 울릉간 연락선인  청룡호 (약 350톤 규모로  자매함인 동해호도 있었다)

  당시를 살았던 울릉도 사람이라면 청룡호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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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대 도동항의 모습입니다.  청룡호에서 승객과 물자를 축강(부두)에 하역하는 "하시게" 의 모습입니다.

도동의_하시게의_장면.jpg


다음의 사진은  청룡호가 퇴역하고 난 다음에  포항 울릉간을 연결하던 여객선인 한일 3호의 모습입니다.  한일 3호 이전에 한일1호가 있었습니다. 한일여객에서 운항하던 선박이었는데  1977년부터 운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77년에 저도 그 쾌속선인 한일1호를 타고 여름방학때 울릉도에 갔었습니다.  느릿느릿하고  구닥다리 청룡호에 비해서 한일호는 그야말로 스포츠카에 비견할 정도로 느낌이 좋았습니다.  한일 1호는 약 800톤에 속도는 최고 20노트로서 빨랐습니다. (80년대의 사진입니다)

10~12시간 걸리던 시간이 6시간으로 단축되었는데  배멀미를 아는 사람에겐 이건  천국의 소리였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절실히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배는  클수록  그리고 빠를 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77년경부터 도동항에 여객선 접안시설이 완공되어서 바지선에 옮겨타는 하시게 없이 바로 부두에 내릴 수 있었습니다)


한일3호.JPG


도동항.JPG

 ◆ 현재의 도동항의 모습과   포항 울릉간의 정기 여객선 썬 플라워호이다.   약 30년간 많이도 변했슴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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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울릉도(독도)와  대통령


 가.  이승만 대통령과   독도 : 평화선(이승만 라인)이 독도를 조국의 품으로 끌어 안았다.

동해.jpg

  

[책갈피 속의 오늘]1952년 이승만 평화선 선포
[동아일보 2006-01-18 04:43]
[동아일보]

1952년에 접어들면서 일본 어민들은 4월 28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이 연합국 측과 제2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해 1951년 9월 8일 체결한 강화조약이 그날 발효되기 때문이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일본 어민들이 ‘본토’ 주변의 정해진 선을 벗어나 조업할 수 없도록 했다. ‘맥아더 라인’으로 명명된 이 선은 강화조약 발효와 동시에 폐지될 터였다.

1952년 1월 18일. 100일 뒤면 동해는 일본 어민들의 텃밭이 될 판이었다. 바로 이날 바다 건너, 전화(戰火)에 휩싸인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부산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확정한 국제적 선례에 의거하고 국가의 복지와 방어를 영원히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될 요구에 의하여’ 해안에서 50∼100마일에 이르는 해상에 선을 긋고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을 한 것이다.

일본으로선 아연실색할 노릇이었다. 일본은 이를 ‘이승만 라인’이라 부르고 철폐를 강력히 요구했다. 우방인 미국, 자유중국도 비난했으나 이승만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일 간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며 ‘평화선’으로 불렀다. 일본 정부가 어민들에게 ‘이승만 라인’을 무시하라고 하자 한국 정부는 군함까지 동원해 ‘평화선’을 넘는 일본 어선을 가차 없이 나포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 어민 1명이 숨지기도 했다. 1961년까지 나포된 일본 어선은 300척이 넘고 억류된 일본인은 4000명에 가까웠다.

평화선은 어업 보호의 절박함이 낳은 산물이다. 당시 국내 어선을 모두 더한 총톤수는 10만 t. 그나마 대부분이 무동력선이었다. 일본은 총톤수 200만 t에다 그중 상당수가 한국 경찰선보다 빠른 ‘첨단’이었다. 맥아더 라인이 사라지면 한국의 어업이 침몰할 것은 뻔했다.

그렇다고 평화선이 어업의 보호만을 노린 건 아니다. 평화선 안에 독도를 포함시킨 것이 절묘했다. 강화조약의 ‘일본이 포기할 지역’에 독도를 넣어 달라는 요구가 거부되자 선수를 친 것이다. 다급해진 일본은 열흘 뒤 ‘한국의 일방적인 영토 침략’이라며 ‘독도 문제’를 쟁점화했으나 이미 기선을 제압당한 뒤였다.

항일 투사 이승만의 쾌거인 평화선이 한일 국교정상화 조약 조인(1965년 6월 22일)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 우리 국민은 울분을 토했다. “얻은 것은 돈이요, 잃은 것은 평화선이다.”


나. 울릉도와 박정희 대통령


다음 사진은 사실 제가 작년에 특종아닌 특종한 사진입니다.  1962년 박정희 대통령(당시 혁명최고의장)이 울릉도를 방문한 모습입니다.  그때는 일본과 수교전입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박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핵심생각한 국가안보였습니다.  지금까지도  국가최고 지도자 자격으로서  울릉도를 방문한 분은 박대통령밖에 없습니다. 

조국의 최동단 동해의 요쇄, 독도에서 을미년 첫해는 떠올랐다. 해발 1백20미터,
총면적 14평방킬로미터,의 이 고도에는 이날도 영해를 지키는 우리 해안경비대원들이
임무를 완수하고 있다.
 
다음의 박대통령 사진을 보시면 박대통령의 국토수호의지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의장 시절 울릉도 방문의 사진입니다. 박대통령은 조극의 극지부터 국토방어의 의지를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 첫 발자욱이 바로 독도민간 수비대를 정규 경찰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울릉도_방문.jpg

 아마도 저당시의 위치는 지금의 이 위치와 비슷 할 것입니다.  이길로 죽 올라가면 울릉군청과 울릉경찰서가 나오며 아래로 내려가면  도동부둣가입니다.  또 울릉도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눈이 많이 내리는 곳입니다.  우리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아침에 해가 안떠서 보면  눈이 지붕까지 올라가 있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저 정도 눈은 울릉도에선 약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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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사진은  박대통령이 울릉도 방문 기념으로 울릉도 학생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행사의 사진입니다.내 기억에 70년대까지도  도서지역 학생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격려한 기억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청와대방문.jpg

다음 사진은  한국 해군이 일대 도약의 전기를 마련한 함정입니다.  충무급 1번함인 충무함(DD-91)의 사진입니다.  미국에서 원조받은 것은 두말 할 필요 없겠지요.  충무함은  우리나라에 기어링급이 도입되기 전까지 기함역할을 한 함정이기도 합니다.  미 해군의 플래쳐급으로서 미국에선  구축함으로 분류하지도 않은 함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콜벳이나 프리킷이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미 해군에선 고속전투수송함이었습니다.

충무함.jpg

 그 이유는  이 충무함(플래쳐급)을 타고  박정희대통령이 처음으로 울릉도를 방문하였기 때문입니다.

최초의_구축함_충무함.JPG


 충무함 인도식 모습

DD91.jpg


 다음의 사진은  울릉도 남양의 송곳산과 추산의 모습입니다. 추산은  유일한 울릉도의 수력 발전소입니다. 울릉도가

외딴 섬이긴 하지만 일찍이 추산발전소를 건립하여  전기혜택을 본 곳이기도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의 기억을 조금

더듬어 보자면 70년대 중반 울릉도에 TV가 막 보급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전기가 부족하다 보니 울릉도에선

도란스(전기 트랜스)가 필수였습니다. 전기를 보다 더 끌어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란스(트랜스)가 없는

집의 전기불은 반대로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추가로 "저동"에  화력발전소가 건설되었습니다. 

추산과_송곳산.jpg

 남양 송곳산의 모습 : 남양은 울릉도에서 그나마 해안 경사가 가장 완만한 곳입니다. 그래도  해안에서 10미더만 나가도

바로 수십미터의 수심을 자랑합니다.  해안에서 100여미터 나가면 바로 수심 100여미터 됩니다.

송곳산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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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와 독도는 가시거리"ytn


[앵커멘트]

울릉도와 독도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요?

실제 거리는 87㎞ 정도인데 맑은 날은 육안으로도 볼 수 있고, 사진도 선명하게 찍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일본의 주장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사진이 잇따라 공개되고 있습니다.

황혜경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태양 아래 작은 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아주 가깝게 느껴집니다.

지난 해 겨울 국제한국연구원이 전문 사진가에게 의뢰해 울릉도에서 촬영한 독도 사진입니다.

울릉도에서 찍은 사진임을 증명하듯 소나무 가지도 함께 담았습니다.

[인터뷰: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일본 정부 공안 문서에서는 울릉도에서 독도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만일 보인다는 증거가 나온다면 이것이 공론이 되고 정론이 바로서지 않냐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게 됐습니다.&quot;

울릉도와 독도, 두 섬이 서로 가시거리에 있다는 사실은 옛 문헌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두 섬 사이에 자주 발생하는 해무로 울릉도에서 독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1년에 40일 정도.

이 때문에 일본은 그동안 각종 근거자료까지 제시하며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도 울릉도에서 독도, 독도에서 울릉도를 촬영한 다수의 사진이 일본의 주장이 거짓임을 확인했습니다.

[인터뷰: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해발 160m 이상 올라가면 울릉도에서 독도는 보인다. 일본 정부는 이걸 모르고 해변가에서 안 보인다는 얘기를 한 걸로 보여지기 때문에...

독도와 가장 가까운 일본 섬은 오키섬으로, 독도와의 거리가 161km 에 달해 울릉도보다 2배 정도 먼데다 육안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자신들이 먼저 독도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진 공개를 통해 울릉도 주민들은 일상 삶 속에서 독도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증명됐습니다.

YTN 황혜경[whitepaper@ytn.co.k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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