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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로보는타이타닉 & 빌게이츠의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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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
가 마운틴휘트니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해준 인생충고 10가지

1.인생이란 원래 공평하지 못하다.
   그런 현실에 대하여 불평할 생각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2.세상은 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세상이 너희들한테 기대하는 것은 네가 스스로 만족하다고 느끼기 전에

   무엇인가를 성취해서 보여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

3.대학교육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연봉 4만 달러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말라.

4.학교 선생님이 까다롭다고 생각되거든
  사회에 나와서 직장 상사의 진짜 까다로운 맛을 한번 느껴봐라.

5.햄버거가게에서 일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마라.
   너희 할아버지는 그 일을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6.네 인생을 네가 망치고 있으면서 부모 탓을 하지마라
  불평만 일삼을 것이 아니라 잘못한 것에서 교훈을 얻어라

7.학교는 승자나 패자를 뚜렷이 가리지 않을 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 현실은 이와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라

8.인생은 학기처럼 구분되어 있지도 않고
   여름 방학이라는 것은 아예 있지도 않다.
   네가 스스로 알아서 하지 않으면 가르쳐주지 않는다.

9.TV는 현실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커피를 마셨으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옳다.

 

10.공부밖에 할줄 모르는 "바보"한테 잘보여라
    사회에 나온 다음에는 아마 "그 바보"밑에서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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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로 읽는 타이타닉(Titanic)

 

타이타닉의 침몰이라는 대참사가 1500명의 희생이라는 재난의 기록에 그쳤다면, 혹은 계급의 비정함이 부각된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토록 오랜 기간 기억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타이타닉을 읽는 또 다른 코드는 일등석(first class) 승객들이 보여준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가진자의 의무)의 정신이다. 계급(class)보다는 오히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타이타닉의 진정한 의미일지도 모른다.

 

카메룬 감독이 만든 타이타닉에서는 계급이 전면에 자리잡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마치 숨은 그림처럼 뒤편에 밀려나 있다. 대중예술인 영화의 속성상 흥행을 위해선 가진 자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이 그들을 옹호하고 칭송하는 것보다 당연히 유리하다. ‘대한뉴스’를 돈 내고 볼 사람은 없다. 전체적으로 일등석 승객의 생존율이 높았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타이타닉 승객들의 생사가 계급에 의해서만 갈린 것은 아니라는 통계도 엄연히 존재한다.

 

대부분의 일등석 승객들은 그 긴박한 상황에서 약자를 우선 보호한다는 ‘여자와 아이 우선’의 원칙 따라 행동했다. 그 결과 생존한 여자 승객과 남자 승객들은 9:1의 비율을 보였다. 또 삼등석 여자 승객들의 생존율이 일등석 남자 승객들의 그것보다 오히려 높았다. 마르크스나 베버의 계급이론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일등석에 탔던 상류사회 인사들이 보여준 ‘원칙에의 복종’은 우리에게 타이타닉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마치 동화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벤자민 구겐하임(Benjamin Guggenheim). 영화에서 의자에 앉아 브랜디 한 잔을 든 채 자신의 시종과 함께 타이타닉 최후의 순간을 지켜본 인물이다. 아비규환 속에 최후를 맞은 그는 스위스 출신으로 미국 철강 재벌이었다. 뉴욕의 유명한 ‘구겐하임 현대 미술관’에 이름이 남아 있는 바로 그 구겐하임이다. 영화에서는 노인으로 묘사됐지만 사실 당시 구겐하임은 46세의 한창 나이였다(카메룬은 아마도 구겐하임의 태도를 ‘살 만큼 산 노인’의 자포자기쯤으로 처리해 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여자와 아이 우선’이라는 구명 보트 승선의 원칙을 지켰고 자신에게 순서가 돌아오지 않자 구명조끼까지 양보한다. 그리고 시종에게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신사답게 가라앉겠다(We‘ve dressed up in our best and are prepared to go down like gentlemen)” 고 말한다. 만찬용 정장으로 갈아입은 그는 브랜디 한 잔을 들고 영화 속에서 보는 바로 그 모습대로 그렇게 그는 최후를 맞았다. 구겐하임은 배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 시종에게 “아내에게 내가 나의 의무에 최선을 다했다고 전하라(tell my wife I’ve done my best in doing my duty)“고 유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한 명의 인물 제이콥 애스토어(John Jacob Astor). 그는 타이타닉의 승객들 중 단연 최고의 부호였다. 지금 뉴욕 최고의 호텔로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포함해 각국의 정상들이 뉴욕을 공식 방문할 때 의례적으로 묵는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Waldorf Astoria Hotel)의 소유주이기도 했다. 당시 그의 아내는 구명 보트에 올랐지만 그는 구조의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영화에 그려진 대로 결국 그는 배의 난간을 붙잡고 밀려드는 바닷물을 바라보게 된다.

 

이사돌 스트라우스(Isador Straus)는 지금도 미국 최대·최고의 백화점인 메이시(Macy) 백화점의 공동 소유주였다. 그는 아내와 함께 유럽에서 휴가를 보내고 미국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여자와 어린이 우선’원칙에 따라 그의 아내 아이다(Ida)는 구명 보트에 승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에게 “당신과 함께 하겠다(Where you go, I go)”며 침몰하는 타이타닉에 남는다.

 

영화에서 선실 침대에 마주보고 누워 서로를 위로하며 최후를 맞는 잘 차려입은 노부부가 바로 이들이다. 잭(Jack)과 로즈(Rose)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때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네가 뛰어들면 나도 뛰어든다(You jump, I jump)”라는 대사는 짐작컨대 카메룬이 이들 부부의 마지막 말을 패러디한 것일 듯싶다. 이들 말고도 일등석의 내로라 하는 많은 명사들이 그렇게 “갔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그 내부의 모순과 그에 따른 무산계급의 봉기로 붕괴할 것으로 내다봤다.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가 완성되는 것을 역사적 필연으로 보았다. 사회주의의 전단계로 자본주의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선 영국이나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예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은 오히려 러시아·중국 등 자본주의가 정착되지 못한 빈곤 국가에서 발생했다. 정작 자본주의가 성숙한 서구 사회에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예언한 무산계급(혹은 피지배계층)의 극렬한 저항을 영국과 미국에서 완화 시켜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타이타닉의 노블리스들이 보여준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그 중 하나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영국과 미국의 자본주의가 자본주의 사회에선 필연일 수밖에 없는 불평등의 모순과 그로 인한 내부의 불만을 완화하고 ‘제국’을 건설한 진정한 힘은 영화 속의 그들이 보여준 노블리스 오블리제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모택동의 아들은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으로 참전해 전사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전쟁영웅이었던 노기 장군의 아들도 전사했다. 미국 명문가이자 재벌의 아들이었던 케네디 대통령은 2차대전 때 해군 조종사로 참전했다. 그가 탄 전투기는 격추됐고, 심한 척추 부상을 입은 그는 잠수함에 의해 가까스로 구조된다. 포클랜드 전쟁 땐 엘리자베스 여왕의 둘째 아들 앤드류 왕자가 뛰어들었다. 포클랜드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에 참가한 그는 거의 결사대의 성격을 띤 선발대로 인빈서블(Invincible)호 갑판의 제일 앞 줄에 섰다. 영국군 장교로서 그는 ‘대영제국기’에 경례를 했다. 영국 국민들은 감동했고 그의 실종 소식에 비탄에 빠졌다. 그가 생환하자 온국민은 열광했다.


 

우리나라의 많은 노블리스(noblesse)들은 어떤가?

 

본인은 물론 자식들까지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복잡한 질병과 이런 저런 사유로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병역을 피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삶의 기회(life chance)를 독점하고 있다는 의구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거대한 부를 축적한 어떤 노블리스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100만원 짜리 월급쟁이보다도 적은 의료보험료를 내고 있다. 그 결과 우리의 노블리스들은 권리에만 충실하고 그에 따르는 의무(oblige)를 소홀히 한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만약 타이타닉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그들도 구겐하임·스트라우스·애스토어와 같은 모습을 보일까? 이런 기대는 어쩐지 자신이 없다. 오히려 떠올리게 되는 건 칼(Karl)의 모습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자선이나 시혜, 적선이나 동정이 아니다. 도덕적·윤리적으로만 기대되는 권장 사항도 아니다. 구겐하임의 마지막 말에 정확히 표현돼 있듯이 그것은 말 그대로 가진 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다. 사회적으로 더 많은 혜택을 누리는 만큼 공동체를 위해 더 많은 공헌과 희생을 해야 할 의무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태생적으로 불완전하고 모순 투성이인 자본주의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안전 장치이다.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결핍이 평등과 분배를 강조하는 이른바‘좌파적’이라는 정치인의 연속적인 집권을 가능하게 하고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보수 이념을 수세와 궁지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의 ‘오블리제 없는 노블리스들(의무를 저버린 가진 자들)’ 때문에 아직도 우리 대학가에서 ‘철 지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민중민주주의론이 일정한 세력을 확보하고 심지어 김일성의 주체사상까지 연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적은 급진좌경세력이 아니라 어쩌면 이들 오블리제 없는 노블리스들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급진좌경세력이 움틀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타이타닉이 국내에서 개봉된 시점은 공교롭게도 IMF 외환위기가 닥치고 전국민적인 “금모으기”운동이 한창일 때였다. 1998년 1월.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300만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 때 이를 두고 할머니의 금비녀까지 장롱 속에서 끌어낸 국민적·애국적 금 모으기 운동으로 마련한 ‘피 같은’ 달러가 영화 한편으로 모두 날아가고 있다는 자조 섞인 개탄을 어느 신문의 칼럼에서 본 기억이 있다.

 

그 숱한 관객들 -특히, 많이 갖고 많이 배운 관객- 이 타이타닉의 침몰과정에 숨어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됐다면 그리 아깝지만은 않은 ‘외화 유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